혜원아 초여름에 우리집 거실 바닥에 베개도 없이 나란히 누워 함께 집을 보던 그때가 생각나 같이 살 자취방을 막 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멍때리다가 구멍 난 우산을 쓰고 함께 카페에 갔잖아 그때 다시 같이 돌아와서 짜장밥을 먹을 걸 "다녀오겠습니다"하던 너의 목소리와 네가 우리집 식탁에 덩그러니 놓고 간 분홍색 약통이 자꾸 생각나
깍지 낀 손을 엮고 흔들면서 고백할 때 네가 잠든 사이에 몰래 떠나버릴까 생각했어 네 온도를 잊지 못했어 떨어진 동백이 눈 앞에 아른거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싶어? 너의 사랑해는 너무 비싸
불행하고 행복하면... 불행이 더 클까 행복이 더 클까 그 물음에 조용히 라이터만 당기던 널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었었는데 잠겼었는데 익사했었는데 같이 가로수길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쉼없이 내달리면 무서울 게 없었지 추위에 귀 끝이 빨간 널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했어 세상이 끝난듯이 어딘가를 바라보던 새까만 그 눈은 천국 따라가고 싶었어 그 어딘가로 그래도...
저게 쓰레기통이 아닌 건 아는데 일단 던져보는 게 사람 마음이지 엇나가면 다신 줍지 않아 이미 추락한 것들 만화 같은 거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만화가 같은 거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야 그냥 스스로와 타협하고 포기한 거야 난 모든 게 멈춰버린 것 같은데 전속력으로 오십 미터쯤 뛰다가 쓰러져버렸는데 똑똑한 사람들은 일정 속도로 수백 미터를 달려나가...
치기어린, 누군가를 사모하는, 나는 당신을 경외, 맹렬히 노려보는, 타오르는 무언가, 쓰러진 손목, 망연자실한, 가라앉은 호수, 부러진 날개, 이상, 영영, 다시 한 번 열망, 반드시, 무심하던 네 눈빛,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새까만 눈, 무던하고 매몰찬, 힘없이 고장난, 불안한 확신, 이리 숭고한 헌신, 필사적인 비상, 추락한 것이기에 안타까운, 이렇게 ...
나 지금도 그림 그린다 신기하지 그땐 그림 같은 거 내 앞에 두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대학도 그림 그리는 과 갔어 신기하지 진짜 오랜만에 꿈에 너 나왔다 심오했어 생생하고 그날 밤 그 꿈을 떠올리는데 네 이름이 생각나질 않더라 존나 이기적이지 미안해 내 기억 속 너의 마지막 모습은 짧은 머리 네 숏컷을 제일 좋아했는데 허무하다. 이렇게 기억이 바래지는 게 무...
스물 다 큰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가 스물이었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피부를 한여름의 햇빛에 제대로 태워먹었던 7월의 너, 거울 보며 중딩 같다고 입술 내미는 까만 네가, 웃으면서 귀엽다고 했던 내가 스물이었다. 열아홉에 자퇴하고 망한 고깃집 앞에서 담배 태우던 너는 겁이 없었다. 손님 없으면 출근 안 시킨다고 지 좆대로라고 짜증 부리던 너를 맘에도 없는 ...
그러니까 붓질을 계속 하다 보면신념 같은 게 생겨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캔버스에 아무 색이나 칠하고 보면 해방감이라도 느껴질 것 같지. 아니야 그거 그냥 무너지는 거야 가슴부터 천천히.그 무너짐을 쓸어내리다 조각에 손가락을 베고붓에 피를 닦고캔버스에 빨간색을 칠하는 거지그걸 이제 동백으로 포장하고, 절망하면서 땅으로 꺼지는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십수 ...
그 애의 그림은 떨어진 날개 같았다 그 날개를 마른 등에 달아주고 싶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라고 본드랑 밴드랑 덕지덕지 붙여서 엉망이 돼도 넌 아름다우니까 가고 싶은 곳으로 언제든 날아가라고 구원해주고 싶었다
날개 뜯고 추락한 천사가 아닐까. 그니까 걔는 날개를 잃은 게 아니야. 뜯은 거야. 제 손으로 허연 날개뼈에 곧고 깊게 박힌 뿌리를.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져선 뻔뻔스레 우리 사이에 섞여 사는 거야.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마냥.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라는 것마냥. 피 뒤집어쓰면 어떤 기분이냐고 묻고 싶었어.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녹아서 손 타고 ...
1 선생님 도시는 안 돼요 거긴 시궁창이에요 냄새나고 더럽고 추악하고 구차한 인간들만 모여있는 시궁창이에요 제가 가봤어요 선생님 저 믿죠 2 내 지루하고 남루한 인생도 적으면 시가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선생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낭만인데 선생님 떠나신다니요 그럼 난 이제 정말 죽어야겠다 반성문도 소용없고제가 다 잘못했습니다눈알만 뽑지 말아 주세요 3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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